글. 신동욱

어느 사적 다큐멘터리 영화는 가장 강력한 ‘마약’이다. 많은 사람들은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며 사람이 다치거나, 심지어 사망했다는 기사를 이부자리에 엎드리거나 지하철에 선 상태로 편안하게 읽어 내려간다. 그런 하루가 하루하루 누적되면 해당 기사가 사실은 자극적이라는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디도록 서서히 변한다. 한두 명이 사망한 교통사고 뉴스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누구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의 뇌는 누구나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그러다 오늘도 여지없이 평범하겠다 싶던 어느 날 아침 화재 기사로 몇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기사 정도는 읽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다가 느닷없이 지구 한 편에서 전개되어버린 충격적인 재난 현장을 생생한 이미지로 직면하게 될 때, 타인의 고통에 중독되어 어지간히 쇼킹한 뉴스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반응을 하지 못하던 사람들도 깜짝 놀라 각성하며 공감능력을 회복하고는 한다.

이미지: (주)엣나인필름

이때 윤리적 각성을 촉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를 수전 손택 Susan Sontag은 사진이라고 주장하며 그를 대표하는 저서 『타인의 고통 Regarding The Pain of Others』에서 로버트 카파 Robert Capa, 타일러 힉스 Tyler Hicks 등 시대를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를 언급했다. 그의 통찰처럼 탁월한 다큐멘터리 사진은 시공간이 교차하는 우주의 한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하여 타인의 고통에 익숙해진 사회에 충격요법을 가한다.

그러나 수전 손택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공부했다면 다른 주장을 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은 손꼽히는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작업을 예술의 영역에서 해낸다. 타인의 고통을 찍어 세계에 알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당장 겪고 있는 실존의 문제, 죽느냐 사느냐를 영화라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통해 전면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이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피사체와 거리를 유지한 채 촬영된 사진보다는, 감독이 곧 스스로 촬영 대상이 되어 몸소 겪어내는 영화 속 생지옥에 깊이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에게 For Sama](와드 알-카팁, 에드워드 왓츠, 2019)와 같은 사적 다큐멘터리 영화는 타인의 고통에 중독된 사회에 강력한 각성을 불러 일으킬 만한 빼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미 3년 전 국내에서도 개봉했고, 전 세계 수많은 영화제에 초청돼 상을 받으며 작품성 검증을 마친 [사마에게]를 다시 평가하려는 칼럼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와드 알-카팁 감독이 어떻게 관객들에게 인류애를 회복하고 공감 능력을 각성하도록 [사마에게]를 만들었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반문해볼 것이 있다. 왜 내가 이 시점에 다큐멘터리 영화 팬들에게 소개할 작품으로 [사마에게]를 골랐느냐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이르러 내 무의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최근에 본 두 장의 사진이 떠오른다. 하나는 러시아군의 폭격을 맞아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버린 어느 건물 사진이다. 한 끗 차이로 무너져 내리지 않은 쪽에 있던 생존자는, 무너져 내려버린 쪽에 있던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는 살았지만 모든 가족을 잃었다. 다른 하나는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완전히 뒤흔들어버린 지진으로 무너져 내린 건물 밖에서, 딸의 손을 잡고 있는 어느 아버지를 찍은 사진이다. 불행히도 딸은 사망한 후였는데, 아버지는 자리를 지키고 앉아 그 손을 차마 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 두 장의 사진이 나를 [사마에게]로 이끌었다. 망자를 가슴 깊이 애도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간단히 요약해 [사마에게]는 폭격이 일상이 되어 폐허가 된 도시 한복판에서 딸의 생명을 지켜나가는 어머니와 공동체 이야기이다. 딸이 사마, 어머니가 이 영화의 감독 와드이다. 영화는 사마가 태어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해 와드가 사마에게 읽어주는 편지 형식의 내레이션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쓴 편지를 내레이션으로 활용한 것은 아니고, 영화 제작을 염두에 두고 내레이션으로 활용하기 위해 편지를 작성했다. 영화에서 각 문장들은 이미지를 충실하게 보충 설명해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정부군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문장처럼 말이다. 그런데 딸 사마에게 직접 말을 거는 편지 형식의 문장도 내레이션에 혼재돼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 [사마에게]는 물론 사마에게 남기는 영상 편지 성격을 일정 부분 띠겠지만, 관객들은 영화 속에서 ‘사마’와 관객 스스로가 동일시되어 있다는 사실 역시 스스로 눈치채지 못한 채 서서히 받아들이게 된다. 관객들에게 호소하는 내레이션을 사마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교묘히 가려 놓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마는 어린 아이다. 이 아이에게 어머니가 쓴 편지는 모성애를 자극하기에 편리해 관객들이 내레이션의 내용에 대해 저항하거나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틈을 주지 않는다. 사실은 관객들에게 하는 이야기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사마에게]의 내레이션은 굉장히 호소력과 수용성이 짙다. 관객들이 자신과 멀리 떨어진 타인의 고통에도 자연스럽게 공감하도록 영화 속에 전략적으로 내레이션이 배치되어 있다.

이미지: (주)엣나인필름

이렇게 호소력 짙은 내레이션으로 관객들의 귀를 붙잡아 놓은 [사마에게]는 그 앞에다 생생하고 생경한 이미지들을 툭툭 떨어뜨린다. 엄청난 굉음이 익숙한 듯 크게 반응하지 않는 사마의 표정, 폭격에 희생되어 죽어가는 아이들, 카메라 바로 앞에 떨어진 포탄과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포화 등이다. 이 이미지들은 감독이 스스로 자처했다는 그 상황이, 사실은 촬영 대상과 영화 제작 주체의 실존을 위협할 정도라는 사실을 직접 관객들에게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사적 다큐멘터리 영화는 말 그대로 감독 자신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촬영 주체인 감독이 곧 촬영 대상이 되기도 하고, 촬영 주체가 촬영 대상과 직접 상호작용하기도 하는 시네마 베리테의 영화적 유산을 그대로 따른다. 그런데 사적 다큐멘터리의 영화적 공간을 전쟁터 또는 재난 현장으로 설정하면 이때는 ‘영화를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는’ 부담이 수반된다. 감독이 먼 발치서 전쟁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마에게]가 시리아 내전중인 도시 알레포로 자신의 딸과 카메라를 동시에 안고 들어갈 때 다큐멘터리 제작자에게 요구되는 시대정신이 극대화되고, 관객은 당장 감독 와드와 딸 사마의 생존부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부정한 권력과 전쟁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잘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는 이렇게 영리하다.

이미지: (주)엣나인필름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전쟁의 참혹함을 새삼 깨닫는 데서 감상을 마치면 안 된다. 감독이 유도하는 대로 윤리적 각성을 한 것만으로 손쉽게 스스로 죄책감을 면제하면, 다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극에 매몰되거나 중독되어 버리는 악순환을 반복할 뿐이기 때문이다. [사마에게]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윤리적 각성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저 편하게 중독되어 버리고 말 것인가를, 그래서 앞으로 얼마나 더 강력한 마약을 원하게 될 것인가를 스스로 알아채고 경계해야만 한다. [사마에게]의 메시지가 전하는 자극만으로 각성할 수 있을 때, 더 늦기 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아주 최소한의 노력을 이제는 정말로 시작해야 한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한때 그렇다고도 생각했지만 정말로 그럴 리가. 우리가 바뀌지 않으면, 영화도 세상을 바꿀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