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혜연

이미지: 소니 픽쳐스 코리아

극장 개봉 때보다 넷플릭스에 최근 공개되어 많은 인기를 끈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여자가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에 맞서는 이야기이다. 흥행 신드롬을 일으킨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하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무성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다. 100년 된 참나무, 스페인 이끼, 사이프러스 늪지, 호수의 끝자락, 드넓은 습지까지. 비극에 놓인 한 여자의 복잡한 감정은 물론, 자연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색채와 풍경들까지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다. 과연 이 영화의 어떤 점이 넷플릭스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는지 여러 가지 포인트로 알아보자.

누군가는 그를 죽이고 싶었다

이미지: 소니 픽쳐스 코리아

1969년 10월, 습지에서 한 남자의 시신이 발견된다. 인근 마을의 부유한 젊은 남자 ‘체이스’였다. 단순 추락사 혹은 자살로 보이는 이 죽음에서 보안관은 살인의 가능성을 본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떠들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의견은 둘로 나뉜다. 현모양처 아내와 화목한 가정이 있는 체이스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진 않았을 거라는 쪽과 그래도 몇 명은 그를 죽이고 싶었을 거라는 쪽으로. 바깥에서의 그의 행실은 발정난 황소와 다름없었다는 말을 덧붙이며.

그렇다면 누가 그를 죽이고 싶었을까? 사람들은 ‘습지 소녀’를 지목한다. 그 소녀가 체이스와 불건전한 관계였다는 그럴싸한 이유부터 그냥 미친 여자이기 때문이라는 터무니없는 말까지 입에 올린다. 심지어 외부인으로서 ‘인격적 결함’이 있다는 주장까지 더해진다. 이 소녀는 정말 살인자일까 혹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약자일까? 그전에, 베일에 가려진 그는 어떤 사람일까?

습지에서 홀로 성장한 여자

이미지: 소니 픽쳐스 코리아

습지 소녀의 이름은 ‘카야’이다. 1953년, 어린 카야는 안락한 집에서 가족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의 폭력에 못 이긴 엄마와 가족들이 하나둘 집을 나가고, 카야는 습지에 홀로 남는다. 마지막으로 집을 떠나던 오빠는 몸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문제가 생기면 습지 깊숙한,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숨으라고 일러준다. 폭력에 시달리던 엄마가 그랬듯 말이다. 하지만 카야는 떠나지도 않고, 숨지도 않는다. 아빠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에 띄지 않고, 모습을 보이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살아가면 된다. 폭력적인 부모를 둔 아이가 스스로 터득한 생존 방식이었다.

카야는 자연의 소리를 메아리 삼아 적막한 밤을 버틴다. 습지의 하루하루는 고단하고, 자연은 냉정하다. 자연은 어린 카야에게 용맹함과 담대함을 가르쳐 주었지만, 응석과 어리광을 받아주지는 않는다. 아이가 아이다우면 좋을 텐데, 씩씩함을 넘어 홀로 굳센 카야는 왠지 안쓰러워 보인다. 그럼에도 카야가 ‘자연에서 배우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번잡한 사람의 속내보다 자연의 냉정함이 차라리 나았기 때문이다.

사실 카야에게는 수많은 기회의 순간과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가족이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습지를 떠났을 때도, 어른들이 학교와 주거지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사랑하는 사람이 더 넓은 세상을 알려주려 할 때도, 카야는 여전히 자연에서 배우는 게 낫다는 이유로 습지에 숨어버린다. 그럴 때면 ‘혼자 사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두려움에 떨며 사는 건 차원이 다르다’는 엄마의 말을 떠올린다. 두려움이 낯선 카야는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고, 휘청거릴 때마다 나를 잡아줄 것은 오직 자연이라고 믿을 뿐이다.

새로 쓰는 약육강식

이미지: 소니 픽쳐스 코리아

그렇다면 카야는 정말 체이스를 살해한 범인일까? 체이스에게 끔찍한 짓을 당한 카야가 정말 그를 죽인 것일까? 긴 재판 끝에 카야는 무죄 판결을 받고, 습지로 돌아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늙어간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습지는 죽음을 통달하고 있다. 비극이라 규정짓지도 않는다’는 평온한 독백으로 시작된 영화는 ‘가끔 먹잇감이 살아남으려면 포식자는 죽어야 한다’는 섬뜩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법칙이 늘 같을 수 없다는 메시지이다.

약한 자가 강한 자에 의해 멸망하는 것만이 ‘약육강식’이라면 카야에게 희망은 없다. 그래서 카야는 새로운 약육강식 법칙을 배워야 했고, 생물학을 공부하며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었다. 극의 후반, 작가가 된 카야는 자신이 관찰했던 반딧불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암컷 반딧불이는 짝을 짓기 위해서, 그리고 수컷을 유혹해 먹이로 삼기 위해서 두 가지 불빛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은 혼돈이며 현혹인 셈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이 되어버린 카야는 이 방법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새로운 약육강식의 법칙을 써내린다.

자연에서 삶을 배운 카야는 성경 속 이브의 본성을 물려받은 인물처럼 보인다. 카야의 생일은 성경에 쓰여 있었고, 습지는 아담과 이브의 낙원인 에덴동산을 연상케 한다. 또한 모험과 탐구에 대한 욕구는 이브의 상징이다.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무는 둘의 성질은 닮아 있다. 그것이 본래 속성인 줄도 모르고 의문을 품거나, 비도덕적이라고 지적하는 이들에게 카야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에 선과 악이 있는진 모르겠어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방법들이죠. 환경이 환경이니 만큼요.

가재는 노래하지 않지만

이미지: 소니픽쳐스코리아

카야는 ‘완전히 혼자가 되자 모든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들렸다’고 생각한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도착한 듯하다. 당연히 가재는 노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단단한 껍데기 안이 텅 빈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 어떤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반대로, 시끌벅적한 소문의 내막이 가장 공허할 수도 있다. ‘반은 늑대라더라’,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 종이라더라’, ‘눈이 밤에 빛난다더라’하는 뜬소문의 실상이 버려진 아이의 치열한 생존기였던 것처럼.

가해자로 법정에 선 그제야 사람들은 카야의 사정을 알게 된다. 이제 세상이 습지 소녀를 공정하게 대할 차례가 됐다. 하지만 고요한 메아리도, 가재의 노래도 들어본 적 없는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멀리 가거라’라는 어머니의 말은 결국 ‘네 심연을 들여다보라’는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