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혜연

지루한 어른들을 구해줄 매력적인 동화가 필요하다. 믿을 수 없이 환상적이어야 하고, 곁을 떠나지 않는 불멸의 존재여야 하며, 세상에 없던 사랑을 맹세할 수도 있어야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200년 전, 뱀파이어가 태어났다.

최초의 뱀파이어 장르는 1819년 영국 소설가에 의해 탄생되었다(존 윌리엄 폴리도리의 「뱀파이어」). 이 뱀파이어 캐릭터가 당시 유명한 시인이자 호색한이었던 자유주의자, 조지 고든 바이런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뱀파이어는 그로부터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있다. 판타지부터 호러, 액션, 성장, 로맨스까지. 어떤 작품에서는 유혹의 아이콘으로 다가오기도 하며, 또 어떤 작품에서는 차갑고도 냉정한 동화로 확장되기도 한다. 아래 영화들을 통해 궁금하지만 가까이할 수 없는, 뱀파이어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보자.

황혼에서 새벽까지 (1996) – 현대적인 감각이 뒤섞인 뱀파이어

이미지: 디멘션 필름즈

1996년에 개봉한 범죄 스릴러 및 슬래셔 공포 영화 [황혼에서 새벽까지]. 하비 카이틀, 조지 클루니, 쿠엔틴 타란티노가 주연을 맡은 이 작품은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 연출했고, 쿠엔틴 타란티노가 각본을 썼다. 그래서일까? 타란티노의 B급 코미디 요소가 상당히 가미되었고, 그의 탁월한 선곡 센스 덕분에 사운드트랙도 일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는 황혼에서 새벽까지 운영하는 술집 ‘Titty Twister’를 배경으로 하며, 이곳에는 인간을 노리는 뱀파이어들이 떼로 등장한다. 그들은 제물로 삼을 인간들을 유인하기 위해 쾌락과 향락을 미끼 삼고, 인간들은 황혼에서 새벽까지 버텨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다. 햇빛과 성수에 약하고, 인간을 무참히 물어버리고, 괴력을 가졌다는 등 전형적인 뱀파이어의 특성을 가졌지만, 현대적인 감각이 뒤섞여 거칠고 쿨한 매력까지 보여준다.

렛 미 인 (2008) – 잔혹하고 서글픈 첫사랑

이미지: 키다리이엔티

[렛 미 인]은 외로운 소년과 창백한 뱀파이어 소녀가 친구가 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어른을 위한 동화로 불리는 원작 소설은 영화, 드라마, 연극으로도 리메이크 되었으며, 한국에서도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다. 외형은 공포 판타지이지만, 아주 서늘한 로맨스이자 안타까운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이해관계에 얽매인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의 관계는 투명하게 맺어진다. [렛 미 인]은 그 순백의 관계를 붉은 피로 흩트려 놓는다. 12살 소년은 너무 일찍 외로움을 알아버렸고, 뱀파이어 소녀는 너무 일찍 욕망을 알아버렸다. 결국 피로 맺어지게 된 이들은 반쪽의 사랑과 반쪽의 불멸을 이어간다. 잔혹하고 서글픈 첫사랑이다. 국내 리메이크 작품이 공개되기 전 미리 감상해 보자.

박쥐 (2009) – 기이하고 기괴한 사랑 이야기

이미지: CJ ENM

뱀파이어가 된 신부가 한 여자의 억눌려 있던 욕망을 깨우며, 살인까지 공모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공포 로맨스 영화 [박쥐]는 박찬욱 감독 작품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송강호와 김옥빈이 뱀파이어 신부와 뱀파이어를 사랑하게 된 여자를 연기했다. 뱀파이어라는 소재 위에 신부, 신앙심, 주기도문 등 종교적 요소가 짙게 깔려 있어 기이한 분위기가 살아난다. 퇴폐적이고 파괴적인 캐릭터들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만, 영화는 강렬함을 넘어 서늘하고 기괴하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음산하고, 인간의 욕망이라 부르기엔 불온하다. 늘 그것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즐기는 박찬욱의 개성이 드러난다. 인간적, 윤리적, 종교적 가치를 생각하게 되지만, 억눌려 있던 여자의 욕망이 분출될 때의 통쾌함만큼 인상 깊은 장면은 없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2013) – 우리가 몰랐던 아담과 이브의 속사정

이미지: 소니 픽처스 클래식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21세기 현대사회에 남겨진 뱀파이어 아담과 이브의 영원불멸 사랑 이야기를 그린 판타지 로맨스 영화로, 뉴욕 인디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짐 자무시의 작품이다. 록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시인을 꿈꿔보고, 온갖 비주류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영화를 만든다면 이런 영화가 탄생하더라. 탐미적이고, 예술적이고, 스타일리시하며, 지적이기까지 하다. 틸다 스윈튼과 톰 히들스턴이 창세기 속에서 튀어나온 아담과 이브를 연기하며, 시니컬하지만 로맨틱한 뱀파이어가 되었다. 이들은 술과 담배, 음악과 춤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미국의 파리라 불렸지만 현재는 황폐해진 디트로이트와 꼭 닮은 인물들이다. 병적으로 사랑을 이어가는 것은 망가진 이들의 생존 방식일지 모른다. 몇 세기를 함께 했음에도 여전히 영원한 삶과 사랑을 원하는 아담과 이브의 속사정을 들어보자.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2014)·모나리자와 블러드 문 (2023) – 힙스터 지수 100%

이미지: 찬란

외로운 뱀파이어 소녀와 고독한 인간 소년의 핏빛 로맨스를 그린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죽음과 고독의 냄새가 풍겨나는 곳 ‘Bad City’를 배경으로, 평범하지 않은 소녀와 소년이 서로의 슬픔을 알아본다. 스타일리시한 연출이 특징이며, 데이비드 린치와 짐 자무쉬의 초기작들을 연상시키는 컬트적 감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스스로를 ‘괴짜’라고 칭한 애나 릴리 아미푸르 감독은 이 데뷔작을 공개한 후 ‘경이롭다’, ‘힙스터 세계의 상징이 될 것이다’ 등의 호평을 받았다. 고요한 거리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소년, 가죽 재킷을 걸치고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우수에 젖은 눈빛과 고양이를 사랑하는 감성 등의 키치한 정서가 이러한 호평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러한 감성을 사랑하는 힙스터들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다.

이미지: 판씨네마㈜

애나 릴리 아미푸르 감독의 뱀파이어 세계관은 2023년 개봉작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을 통해 한 번 더 확장되었다. 배우 전종서가 주연을 맡은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은 붉은 달이 뜨던 밤, 폐쇄병동에서 스스로 탈출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화려한 도시 뉴올리언스에서 상대의 육체를 지배할 수 있는 모나가 일확천금을 꿈꾸는 댄서, 로맨티시스트 DJ, 락 스피릿을 가르친 11살 소년, 언럭키한 경찰을 만나 특별하고 기묘한 모험을 펼친다. 한층 더 감각적이고 과감해진 뱀파이어 판타지를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