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혜연

이미지: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유)

2019년 공개된 SF 영화 [컨택트]는 현존하는 최고의 SF 소설가로 평가받는 ‘테드 창’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은 최고의 과학소설에 수여되는 8개 상을 모두 석권한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이다. 남다른 상상력과 섬세한 문체를 가진 테드 창의 이 소설은 영화적 서스펜스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드니 빌뇌브 감독에 의해 영화로 재탄생했다. 출연진은 에이미 아담스, 제레미 레너, 포레스트 휘태커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호흡을 맞췄다. 그들이 선사하는 연기는 놀라움과 벅참, 그리고 눈물까지 다양한 감정이 보는 이의 마음을 적신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인간과 외계인의 조우’이다. 전 세계에 날아든 12개의 쉘(포스터의 비행체), 그리고 그들이 보내는 의문의 신호를 통해 지구에 온 이유를 밝혀야 하는 언어학자 루이스와 물리학자 이안의 이야기가 중심이며, 이를 통해 진정한 소통의 의미와 삶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다층적인 구조로 흘러간다는 점과 ‘언어 결정론’(사피어-워프 가설)을 소재로 했다는 점이 [컨택트]만의 특징이다.

언어 결정론 혹은 사피어-워프 가설이란, 한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과 행동이 그 사람이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언어학적인 가설이다. 언어가 인간의 의식과 사고, 세계관까지 결정한다는 것이다. 다소 비약적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 우리가 선택하는 단어들 속에는 우리 무의식이 상당히 깃들어져 있다. 이 이론을 바탕에 둔 영화 [컨택트]는 슬픔에 빠진 언어학자가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하며, 마침내 자신의 삶까지 이해하게 되는 영화이다.

‘한나(HANNAH)’의 세계

이미지: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유)

영화는 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아담스) 박사가 딸 한나(HANNAH)와 놀고 있는 행복한 기억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고, 이내 딸 한나는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게 된다. 주인공 루이스가 커다란 상처를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현재에서 12개의 외계 비행 물체가 미국,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 상공에 등장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임무를 부여받은 루이스는 과학자 이안 도넬리(제러미 레너)와 함께 외계 비행 물체에 접촉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18시간마다 아래쪽에서 문이 열리는 외계 비행 물체 내부로 진입해 정체 모를 생명체와 마주하게 되고, 그들이 지구에 온 이유를 밝혀내야 한다.

루이스가 마주한 외계인의 이름은 (다리가 7개 달린 모습에서 본딴) ‘헵타포드’이다. 인류는 그들이 지구를 침략할까 염려했지만, 그들은 의외로 인간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매우 입체적이며 진화된 형태의 언어인 ‘헵타포드어’를 사용한다. 헵타포드어의 특징은 미래를 포함한 모든 시간이 한꺼번에 담겨 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한꺼번에’라는 표현이 맞다. 그들의 시간은 인간과 달리 비선형적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인과론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이 순차적이지 않고,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며, 그럼에도 질서는 존재한다는 관점이다. 그들의 언어 체계로 보아 분명 헵타포드의 사고와 인지는 현재의 인간보다 몇 차원 앞서 있다.

또한 정말로 언어가 세계관을 결정하는 것인지, 헵타포드의 언어는 직선이 아닌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는 상관이 없고, 순서와 방향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이것은 어떻게 읽어도 변하지 않는 ‘한나(HANNAH)’라는 이름과도 닮아 있다. 여기에서 한나(HANNAH)’라는 이름이 암시하듯이, 루이스는 이미 그들의 세상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이다.

언어는 선물이다

영화에서 묘사하는 헵타포드어

그러나 아무리 언어학자라지만, 외계인의 의도까지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일까? 게다가 헵타포드어는 도저히 언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간결하고, 흩뿌린 낙서에 가까워 보이는데 말이다. 루이스는 투명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들과 끊임없이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그들의 언어를 이해함으로써 그들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이스는 마침내 어떤 형상을 보게 된다. 그 이미지는 다름 아닌 ‘미래’이며,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한 루이스는 그들의 능력인 예지력을 얻게 된 것이다. 이는 헵타포드가 루이스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언어는 문명의 초석이자 사람을 묶어주는 끈이며 모든 분쟁의 첫 무기다.” 루이스가 자신의 책 서문에 적은 문장이다. 그가 언급한 무기는 인류를 망치고, 갈라놓을 수 있다는 부정적인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헵타포드에게 무기는 ‘도구’, ‘능력’이라는 뜻이었고, ‘무기를 사용하라’는 문장은 곧 ‘언어라는 선물로써 소통과 화합을 이루라’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헵타포드가 지구에 온 목적은, 메시지의 의미를 오인한 인류를 돕기 위함이었다. 루이스가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이 작은 오해로 인해 인류는 커다란 위기에 놓였을 것이다.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이유

이미지: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유)

영화의 원제는 ‘Arrival’로, 도착과 도달을 의미한다. 우리가 꼭 어딘가에 도달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비극일 것이다. 외계인들이 떠난 후, 루이스는 미래에 남편이 될 이안에게, 미래를 알 수 있다면 그 미래를 바꿀 것인지 질문한다. 미래를 알지 못하는 이안은 싱거운 질문이라 생각했는지 루이스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루이스는 자신의 딸이 어린 나이에 희귀병으로 죽게 되며, 이안과의 결혼도 결국 비극으로 끝나게 될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미래를 약속한다. 아마 그는 몇 번의 똑같은 비극이라도 모두 껴안을 것이다.

비극적인 미래를 알고도 현재를 바꾸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가 미래를 위해 존재하고, 시작이 끝을 위해 존재한다는 관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운명을 바꾸려는 시도보다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 더 값진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루이스는 헤어질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가 서글픈 운명 앞에서 낙담에 빠진 이들을 구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