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석과 신세경이 주연을 맡은 [세작, 매혹된 자들]은 가볍고 경쾌한 퓨전 사극들의 방영 후 등장한 진지하고 깊은 멜로드라마 사극이다. 사랑과 목표를 놓고 갈등하는 두 남녀를 각각 왕과 세작, 즉 목적을 위해 정보를 빼돌리고 상대를 교란하는 스파이로 설정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신하들 간의 권력 대립, 왕과 나라를 위하거나 배신하는 백성들의 이야기까지 어지럽게 진행된다. 통쾌한 ‘사이다’와 매 회차마다 ‘도파민’을 솟구치게 하는 전개를 선호하는 트렌드를 따르지 않고, 사건과 감정, 분위기 등 전체를 감상해야 재미를 찾을 수 있는 드라마로 자리매김했다.

이미지: tvN

드라마는 조선 조정이 청나라의 침략에 항복하면서 시작된다. 왕의 동생인 진한대군 이인(조정석)은 인질로 청나라에 갔다가 몇 년 만에 돌아오지만, 임금은 자신을 견제하고 신하들은 그를 이용해 권력을 잡을 생각에 가득하다. 그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는 것은 바둑과 바둑 실력으로 자신을 홀린 정체불명의 내기바둑꾼이다. 내기바둑꾼, 즉 희수(신세경)는 남장을 하고 내기바둑으로 도성 내 양반들을 이겨 청나라에 끌려간 백성들의 몸값을 마련한다. 오랫동안 동경한 인과 바둑으로 친구가 되었고, 그 때문에 자신과 아끼는 이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인이 그들을 구해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형이 독살당했다고 믿는 인은 배후를 밝히기 위해 왕위에 오르는 걸 택하면서 희수를 배신한다. 친구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희수는 인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3년 후 왕의 바둑상대가 될 ‘기대령’을 뽑는 자리에 나타나 인과 재회한다.

[세작, 매혹된 자들]은 조선시대 여러 역사적 사실에서 영감을 받았다. 청나라 인질로 다녀온 후 왕에게 미움받는 왕자, 왕이 죽자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삼촌, 선왕의 아들이란 존재가 왕위에 끊임없이 위협이 되는 상황, 청나라에 시집가는 공주 등의 소재는 한국 사극에서 자주 쓰였다. 개별로 존재하는 사건을 한데 모으면 이보다 더 비극적일 수 없는 ‘이인’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한편 능력이 빼어난 양반가 여성이 남장을 하고 활약한다는 ‘남장여자’ 설정, 청나라 침략 후 핍박받고 돌아온 백성들의 눈물 가득한 이야기 속에 ‘강희수’라는 캐릭터가 탄생했다. 

인과 희수의 연결고리는 바둑으로, 몇 수 앞을 내다봐야 하는 치밀한 두뇌 게임이다. 궁궐 안팎의 사건이 인과 희수를 위기에 몰아넣거나 특정한 선택을 강요할 때, 두 사람은 머리를 굴려 위기를 빠져나가고 상황을 뒤집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이걸 보면 드라마 속 세계는 마치 거대한 바둑판같고, 인과 희수는 돌을 하나씩 잡고 맹렬하게 바둑을 두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두 인물이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선택만 하진 않는다. 가장 냉정해야 할 선택의 순간에 이들은 서로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이 모순된 순간에서 시청자들은 고통을 감내하는 인에게 공감하거나, 사랑과 복수 사이에서 갈등하는 희수를 동정할 것이다. 아니면 에디터처럼 ‘제발 솔직하게 말을 해!’라고 외치면서 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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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작, 매혹된 자들]은 결국 멜로드라마이며,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를 겪는 캐릭터의 감정을 따라간다. 초반부에는 배우들의 캐릭터 해석이나 연기의 합이 묘하게 어긋난다는 듯하지만, 3년 후로 시간이 옮겨간 5화부터는 안정된다. 그러면서 배우들의 연기력이 캐릭터와 사건에 활기를 불어넣는데, 특히 조정석의 ‘인’은 “사극 연기를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캐릭터 소개글로 알게 된 인보다 더 강하면서도 나약하고, 흔들리면서도 한결같이 곧은 인상을 주는데, 이는 호흡, 표정, 발성 등으로 짧은 순간에 인물의 심정을 명확하게 전하는 게 한몫한다. 자칫 ‘그저 그런 권력 쟁탈 드라마’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인과 희수의 이야기로 만드는 데에는 그의 공이 크다.

16부작인 드라마는 지난 일요일에 12화에서 클라이맥스로 가는 준비를 시작하며 본격적인 피바람을 예고했다. 인이 희수를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형의 독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인이 그동안 준비해 왔던 큰 그림들이 펼쳐질 것이다. 사랑과 배신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인의 곁에 있는 희수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떤 선택을 할지도 보여줄 것이다. 희수를 그저 남장한 여성이라고만 아는 인이 희수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되었을 때의 반응도 궁금하다. 지금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그들의 미래가 가시밭길인 것은 확실하니, 이쯤 되면 그저 두 사람이 목숨은 건져 여생을 조용하고 편안하게 사는 게 최고의 해피엔딩일지도 모르겠다. 어지러운 권력 다툼보다 두 연인의 현재와 미래가 궁금해서, 그리고 배우들의 ‘미친 연기력’을 더 즐기고 싶어서 이 드라마를 계속 지켜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