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은빛유니콘

‘에르퀼 포와로’와 ‘미스 마플’이라는 인기 탐정 캐릭터를 탄생시키며, 지금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영국의 대표 추리 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 [오리엔트 특급 살인], [나일강의 죽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 그의 소설들은 영화와 드라마로 여러 차례 제작되며 다양한 매체로 뻗어나갔다. 특히 2015년 BBC에서는 아가사 크리스티 탄생 125주년을 맞이해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여러 드라마를 제작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작품들은 단순히 소설을 영상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부 시리즈의 캐릭터 설정이나 결말을 원작과 다르게 하며 드라마만의 재미를 건넸다. 미니시리즈 형식으로 러닝타임도 짧아 부담 없이 볼만한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 드라마. 어떤 작품들이 있었는지 살펴보고, 다시 한번 미스터리의 재미에 푹 빠져보자.

누명 (Ordeal by Innocence)

이미지: BBC

부유한 자선가 레이첼이 자신의 저택에서 살해당한다. 레이첼은 여러 명의 아이들을 입양해 키워왔는데 그를 죽인 범인은 양아들 잭이었다. 잭은 자신의 결백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교도소에 수감 중 사망한다. 이후 한 남자가 나타나 잭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그가 진범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처럼 드라마 [누명]은 레이첼을 죽인 진짜 살인범을 추리하는 내용이다. 진범의 후보로는 입양아들과 재혼을 앞둔 레이첼의 전 남편 레오, 레오의 예비 아내, 하녀가 있다. 각자 모두 레이첼을 살해할 동기나 의문스러운 점이 있는데, 한정된 공간에서 진범을 추리하는 방식을 치열하게 그려낸다. 특히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가족인 이들의 진실과 추악한 면들이 점차 드러나면서 범인뿐 아니라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도 무엇인지 궁금하게 한다. 3부작 드라마 [누명]은 [러브 액츄얼리]의 빌 나이, [마녀의 발견]의 매튜 구드, [페니 드레드풀]의 해리 트레더웨이, [폴다크]의 엘리너 톰린슨이 출연해 이야기의 밀도를 더한다. (캐치온)

파트너스 인 크라임 (Partners in Crime)

이미지: BBC

1950년대 런던, 아들을 키우며 평화롭게 사는 토미와 터펜스 부부가 탄 기차 안에서 뜻밖의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부부의 맞은편 자리의 젊은 여자 제인이 실종되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부부는 제인의 행방을 쫓는다. 조사 결과 이들이 찾으려고 했던 제인은 영국과 적대 관계인 소련의 스파이 브라운과 연관이 있는 인물로 밝혀진다. 부부는 영국 정부에서 일하는 토미의 삼촌을 도와 본격적인 수사에 나서지만, 진실에 다가갈수록 커다란 위험을 마주하게 된다. 6부작 드라마 [파트너스 인 크라임]은 냉전시대 속 영국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존재들이 등장해 당시 사회 분위기를 적극 반영한 작품이다. 여기에 주인공 부부가 전문 탐정이 아닌, 추리 소설을 읽고 사건을 수사하는 아마추어라는 점이 명탐정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이전 작품들과 차별화된 재미를 자아낸다. (왓챠, 웨이브, 시리즈온)

창백한 말 (The pale horse)

이미지: BBC

부유한 골동품 중개상 마크 이스터브룩은 아내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허미아와 재혼했지만, 다른 이를 만나며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어느 날 마크는 낯선 여인의 시신에서 발견된 의문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어 경찰 조사를 받게 된다. 만난 적도,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여인이 쓴 명단들 중 유일하게 물음표가 붙어있는 마크. 이후 명단에 있는 사람들이 연이어 사망하자 마크는 악몽에 시달린다. 명단에 적힌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던 마크는 ‘창백한 말’이라는 여관에서 사람들이 점을 보고 저주를 내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계속해서 기이한 일들과 환영을 겪는 마크는 정말 저주에 걸린 것일까?

드라마의 제목인 ‘창백한 말’은 성경에 나오는 묵시록의 네 기사 중 죽음이 타고 다니는 말이다. 이처럼 작품은 죽음의 공포를 마주한 마크를 주인공으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답지 않은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범죄 스릴러보다 오컬트 호러 같은 분위기가 신선하면서도 서늘한 재미를 건넨다.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마크 역에 [빅토리아], [주디]의 루퍼스 스웰, 허미아 역에 [스킨스]의 카야 스코델라리오가 출연해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2부작 드라마 [창백한 말]은 속도감 있는 전개와 죽음 앞에 불안해하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로 시청자를 사로잡는다. (캐치온)

검찰 측의 증인 (The Witness for the Prosecution)

이미지: BBC

화려한 삶을 사는 사교계의 여왕이자 부유한 상속녀 에밀리가 살해당한다. 에밀리 살해 용의자는 그의 젊은 애인 레너드 볼로 좁혀진다. 이에 레너드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 존 메이휴는 그의 주변 인물들을 찾아가 사건을 파악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존은 에밀리의 하녀 자넷이 그에게 질투심과 경멸감을 가진 것을 눈치채면서 진실의 향방은 미묘하게 달라진다. 한편 레너드의 아내 로메인은 바람피운 남편의 재판에 검찰 측 증인이 되면서 사건은 더욱더 미궁에 빠지게 된다. 과연 로메인은 부부의 믿음을 저버린 남편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줄까?

드라마 [검찰 측의 증인]은 얼핏 법정물처럼 보이지만, 진짜 본질은 부부 스릴러에 가깝다. 바람을 핀 남편에 대한 증언을 해야 하는 아내의 미묘한 심리를 섬세하게 다루면서 사건의 진실에 서서히 다가간다. 또한 이들의 복잡한 관계를 바라보는 변호사의 심정변화도 비중 있게 그려내며 추리의 재미도 놓치지 않는다. [섹스 앤 더 시티]의 킴 캐트럴, [더 서펀트]의 빌리 하울, [캡틴 아메리카]의 토비 존스가 흡입력 있는 연기를 보여주며 마지막까지 사건의 진실과 재판 결과를 흥미진진하게 펼쳐낸다. (웨이브, 티빙, 왓챠, seezn, 시리즈온)

ABC살인사건 (The ABC Murders)

이미지: BBC

은퇴한 노년의 탐정 에르퀼 포와로는 ABC라고 서명된 살인을 예고하는 편지를 받는다. 그는 이 편지를 심각히 여겨 경찰에 알리지만, 젊은 크롬 경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후 A-B-C 순으로 시작하는 장소와 이름의 사람들이 차례로 죽는 사건, 즉 A마을에 A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에 포와로는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 다시 한번 명탐정으로 돌아온다. 드라마 [ABC 살인사건]은 범인의 정체가 결말에 드러나는 작품과 달리, 처음부터 그 모습을 숨기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에르퀼 포와로가 은퇴한 시점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이전과는 달리 유머가 거의 없는 고뇌에 찬 인물로 다가와 시리즈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건넨다. 존 말코비치가 기존 시리즈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포와로 역을 맡아 이야기의 중심을 잡는다. 여기에 [해리포터]의 루퍼트 그린트가 크롬 경위로 등장, 포와로와 대립하면서도 나중 함께 진실을 파헤치는 조력자로 극의 재미를 더한다. 3부작 드라마 [ABC 살인사건]은 드라마로 나오면서 원작의 몇몇 부분을 새롭게 각색했는데,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신 분이라면 무엇이 달라졌는지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포인트가 될 듯하다. (캐치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