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동욱

이미지: (주)하이하버픽쳐스

박혁지 감독 신작 영화가 내년 1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 [시간을 꿈꾸는 소녀] 소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무속인과 광고기획자 지망생 사이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세우려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극영화에서는 흔히 누아르, 멜로, 스릴러 등으로 ‘장르’를 구분해 부른다. 낯설지만 다큐멘터리도 세부적으로는 ‘생태 다큐멘터리’나 ‘인물 다큐멘터리’, ‘저널리즘 다큐멘터리’처럼 일종의 장르를 구분하는데, 이중 휴먼 다큐멘터리는 우리나라에서 다큐멘터리 경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양식 중 하나다.

한국에서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는?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는 ‘인간극장’처럼 TV 프로그램으로 제작되어 오다가, 2000년대 중반을 넘어 방송 제작 인력이 영화 산업으로 유입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국내 다큐멘터리 영화 시장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특별히 ‘시장을 주도하는 양식’이라고 표현한 데는 다른 이유가 없다.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영화 시장은 2000년대를 지나오는 동안 딱히 ‘시장’이라 부를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영화관도 아닌 공동체 상영을 위주로 관객들을 만나오다 90년대 후반 국내에서 영화제가 하나 둘 설립되면서 다큐멘터리 영화는 조금씩 영화관으로 진출해왔다. 이 시기에 다큐멘터리 영화는 태동기의 거칠었던 만듦새를 보완하고 스스로 미학적 성취를 이루어 나가며 관객들을 만날 채비를 조금씩 하고 있었는데, 국내 다큐멘터리 영화에 잠재되어 있던 시장성을 폭발시킨 계기가 바로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2009년 이충렬 감독의 영화 [워낭소리]가 느닷없이 300만 명에 가까운 누적 관객수를 기록한 것이다.

국내 다큐멘터리 흥행작 중 휴먼 다큐멘터리 작품들

지금도 다큐멘터리 영화는 영화관에서 관객 300만 명은 고사하고 3만 명을 만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워낭소리]가 폭발시킨 시장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래서 특히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를 이야기할 때 ‘시장성’ 또는 ‘상업성’이라는 단어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이 양식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 양식과 비교하면 적어도 흥행만 두고 봤을 때는 관객들을 가장 많이 만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영화 흥행 순위만 봐도 알 수 있다. 1위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진모영, 2014), 2위가 [워낭소리], 3위가 [노무현입니다](이창재, 2017)이다. 흥행 상위 10위까지를 살펴보면 [울지마, 톤즈](구수환, 2010)도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에 해당한다. [공범자들](최승호, 2016)과 [자백](최승호, 2016) 등 소위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영화와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가 흥행 상위 랭킹을 양분하고 있는 모양새를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박혁지 감독의 작품 세계는?

박혁지 감독의 작품들

그리고 박혁지 감독은 이 양식을 대표하는, 말하자면 ‘장르 영화 감독’이다. 극영화에 비유하자면 [8월의 크리스마스](1998)과 [봄날은 간다](2001)을 연출했던 멜로 영화의 대가 허진호 감독이나, 한국형 스릴러 영화 시대를 개척했던 나홍진 감독 또는 외국으로 치자면 [겟 아웃](2017), [어스](2019), [놉](2022) 처럼 미스터리 영화로 영화 팬들을 설레게 하는 조던 필 같은 느낌이다. [춘희막이](2015)와 [오 마이 파파](2016), 그리고 근작에 속하는 [행복의 속도](2021) 등 박혁지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로 채워지는 동안 감독은 각 작품마다 일정한 수준 이상의 누적 관객수를 기록하거나 평단으로부터 꾸준한 호평을 받아왔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영화 팬들에게 [시간을 꿈꾸는 소녀]의 개봉을 기다리는 마음은 ‘오랜만에 양질의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를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설렘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박혁지 감독이 모든 작품에서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담보했던 것은 아니다. 박혁지 감독은 여전히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아직까지도 그를 대표하는 필모그래피인 [춘희막이]의 경우엔 3만 명에 가까운 관객들이 봤는데(다큐멘터리 영화에 한정하면 적지 않은 흥행 스코어이다), [워낭소리]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보여준 전형적인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 서사를 거의 벗어나지 않고 주인공만 바꿔 그대로 재생산 또는 답습한 작품이다. 여기서 ‘전형적인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 서사’란 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지나온 삶과 현재의 삶을 조망하는 영화라는 뜻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인물들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를 포함하는 경향을 보인다. [춘희막이]는 이 전형성을 그대로 따라간다. 감독이 유도하는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을 먼저 떠난 남편과 이웃 배목댁을 거쳐 자연스레 도달하는 지점이 바로 사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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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세가 깊어짐에 따라 막이 할머니는 춘희 할머니에게 돈 세는 법부터 알려주며 ‘이후’를 대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과정에서는 음악 연출이 깊숙이 개입하기도 한다. 특히 김광민이 연주한 ‘지금은 우리가 멀리 있을지라도’를 삽입한 시퀀스는, 봉합하지 못한 서사를 감정적으로나마 억지로 이어붙이려는 무리한 시도로 읽힌다. 영화를 어떻게 마무리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시퀀스 사이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자 일단 음악으로 꿰매어 붙였다는 뜻이다. 요컨대 [춘희막이]는 멜로드라마적 서사 구성을 취하며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대를 잇기 위해 후처를 들였던 가부장적 질서에 충분히 다가가지 못했음도 아쉽다. 다만, 다시 한 번 국내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의 경향성을 반복해 증명한 작품으로는 선명하게 남았다.

시간을 꿈꾸는 소녀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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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혁지 감독은 [춘희막이]가 남긴 한계들에도 다음 작품인 [오 마이 파파]를 통해, 종교인을 주인공으로 서사를 전개하는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또다른 경향성 한복판에 자신이 놓여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한편 [춘희막이]의 변주 또는 자기 복제는 피해가는 노련함 또는 상업적 균형 감각을 보여준다. 자료 영상과 인터뷰를 영화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며 [춘희막이]보다도 친절한 다큐멘터리를 내놓은 것이다. 내레이션만 있으면 방송용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해도 믿을 만한 [오 마이 파파]를 지나, 박혁지 감독은 2021년엔 다시 한 번 그동안 선보인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를 내놓는다. [행복의 속도]말이다. 영화적 공간을 한국에서 일본으로 옮겨갔을 뿐만 아니라 죽음보다는 삶에, 불행보다는 행복에 초점을 두고 영상미를 끌어올려 관객들 앞에 내놓은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춘희막이]보다, [오 마이 파파]보다 [행복의 속도]를 더 높이 평가한다. 물론 [오 마이 파파]에 이르러 [춘희막이]보다 다소 줄어든 수준이었던 누적 관객수가 [행복의 속도]에서는 1만 명도 채 되지 않을 만큼 눈에 띄게 빠졌지만 말이다. 그래서 [시간을 꿈꾸는 소녀]가 궁금하다.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 양식 안에서 나름대로 꾸준히 변화를 시도해 온 박혁지 감독이, 이번엔 또 어떻게 다시 스스로 자신만의 균형을 잡은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을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