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동기

이미지: (주)쇼박스

여느 유행가 가사에 사랑 이야기가 쉽게 빠질 수 없듯이, 흥행하는 영화 속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자주 등장한다. 현실 속에서 쉽게 마주하기 힘든 살인사건도 제법 흔하고, 때로는 화려한 액션과 각종 서사가 난무하기도 한다. 그래서 누구나 보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고 나면, ‘영화처럼’이란 단어를 주저 없이 꺼내는 거다. 그게 액션이든 스릴러든 간에 장르를 막론하고, 그 구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단순하고도 재미있는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어쨌든 누군가는 쫓고 쫓기는 관계에 포함되고 이들은 흘러가는 사건과 무관하게 서로 죽고 죽이는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이유조차 모른 채, 그저 난무하는 화려한 액션만을 즐기게 될 뿐이다.

영화 [범죄도시](2017)를 예로 들면, 마땅히 죽일만한 이유가 있어 죽는 이는 하나도 없다고 봐도 무방할 거다. 그냥 마구 죽고 죽이는 가운데, 관객은 도대체 ‘왜’라는 꼬리표를 떼지도 못하고 그 자체를 즐기게 된다. 흔히 말하는 ‘킬링 타임’이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시간 때우기’일 뿐인데, 아마도 이런 식의 해석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싶다. 이 가운데 이런 스타일의 영화 중 묘하게 그 경계에 서 있는 작품 한 편이 있다. 왜 죽여야 하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조차 모르지만,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서로 쫓고 쫓으며 그 속에서 독특한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작품, 영화 [황해](2010) 이야기이다.

이미지: (주)쇼박스

구남(하정우 분)의 첫 등장이 그리 자연스러운 건 아니었다. 팍팍한 삶에 찌들어 사는 그는 도박에 빠져 한탕을 노리지만, 언제나 그렇듯 일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는 어서 빨리 빚을 갚고 가정을 일으켜 세울 이유가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떠난 후 연락이 끊어져 버린 아내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은 찰나에 면정학(김윤석 분)이 솔깃한 제안을 던진 건 그에게 합당한 이유를 제공한다. 정리하면 적어도 이 영화의 초반은 분명 모든 상황이 ‘이유’를 끌어안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왜’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됐고, ‘왜’ 도박에 빠지게 됐으며, ‘왜’ 면정학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타당한 이유 말이다.

하지만 그가 한국으로 건너가 그가 죽여야 할 이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상황은 일순간 그 ‘이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가 죽여야 했던 김승현(곽도원 분)은 ‘왜’ 구남이 손을 쓰기도 전에 타인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으며, 김태원(조성하 분)은 ‘왜’ 구남을 죽여야 하며, 면정학은 ‘왜’ 자신을 배신했는지 등에 대한 것들이 그렇다. 사실 영화가 얘기하고 싶었던 건, 딱히 소통되지 않거나 원한에 얽힌 복잡한 구성이 아니었다. 그저 불편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복잡한 실타래를 풀고자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기 위해, 단지 한 발자국 정도를 앞으로 내딛는 얘기에 불과했던 거다.

이미지: (주)쇼박스

그게 그들에게 그렇게 커다란 의미로 새겨질 줄 알았다면, 또 우리가 모두 그러한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이를 받아들이는 우리 자신의 삶이 조금은 변화의 여지를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다시 생각하면, 영화 [황해]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치정(癡情)이나 오해로 얽힌 여러 인물 사이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게 보기보다 강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건, 눈앞에서 여러 죽음을 마주하고 극한의 상황이 오가는 가운데에서도 진짜 이 현실을 만들어낸 누군가를 쉽게 드러내고 있지 않아서다. 서두에서 얘기한 잃어버린 ‘왜’에 대한 바로 그것 말이다. 관객은 배우들의 열연에 몰입해 액션과 서사가 동시에 던지는 재미를 얻게 되지만, 실상 영화가 얘기하고 있는 건, 과연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삶을 지탱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거시적인 질문이라고 봐도 좋겠다.

영화의 제목을 의미하는 ‘황해’는 한반도와 중국을 끼고 삼면이 둘러싸인 바다를 지칭한다. 눈에 띄는 누런 빛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탁한 강물 때문이다. 황해는 여러 이유에서 모호한 경계를 타고난 곳이다. 한반도를 기준으로 동해나 남해와 비교해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크다. 여기에 작은 섬과 암초가 많아 큰 배들이 드나들기에도 애매하다. 황색 자체가 이런 경계를 끼고 있음을 생각하면, 아마도 영화의 배경이 되는 연변 지역을 거주지로 한 ‘조선족’을 들이민 건 이와도 결부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조선족’이라는 애매한 위치의 정체성과 함께, 삶의 목적과 이유에 대해 깊이 있는 고찰을 시도하는 것도 그렇다.

이미지: (주)쇼박스

중국은 물론 한국 내에서의 조선족에 대한 문화적 관용성 부족 문제는 그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조선족’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은 결국 앞에서 언급한 ‘왜’라는 이유와도 연결되는데, 구남이 오도 가도 하지 못하는 처지에 빠져버린 것, 그리고 주어진 상황이 계속해서 실타래를 풀지 못하는 것도 관객에게 던져진 질문, 즉 ‘조선족’이라는 역사적 정체성을 해석하고자 하는 목적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게 그들 사이에 놓인 ‘황해’라는 제목을 끌고 온 이유일 테고 말이다.

영화가 개봉된 후, 구남이 식당에서 ‘김’을 먹는 장면이 곳곳에서 다양하게 오마주(hommage)됐다. 단지 먹성 좋은 구남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장면만으로 보기엔, 해당 씬이 전하는 인상이 무척 깊다. 서해는 김 양식에 최적의 환경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자연의 특징을 이용한 독특한 표현일 수도 있고, 땅과 바다 사이의 경계에서 거칠게 자라는 ‘김’의 특징을 ‘조선족’의 그것과 연결한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는 처음부터 줄곧 경계에 놓인 이들의 삶과 현실에 대한 목소리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이는 단지 어려운 현실을 드러내고 호소하는 게 아닌, 그 색의 정체성, 즉 역사적 배경을 통한 스스로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수긍과 수용이 아닌, 하나의 제대로 된 ‘정의’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말이다. 그게 바로 ‘왜’라는 한마디로 표현되는 그것일 테다.

이미지: (주)쇼박스

영화는 마지막까지 그 이유에 대한 서사를 쉽게 풀어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관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는 듯, 구남이 오랫동안 찾아 헤맨 그 이유에 대한 작은 단서만큼은 꺼내 놓은 모습이다. 지금까지 꽁꽁 싸맨 ‘왜’를 바라보는 갈구를 고려한다면, 좀 더 친절한 해석을 원한다면 그건 과욕인 것일까. 여기에 구남의 아내로 추정되는 시신을 표현하는 장면조차도 누런빛의 그림자에 갇혀 있었다면 그나마 적당한 이유가 될는지 모르겠다. 김승현의 죽음을 시작으로 김태원과 면정학, 그리고 구남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너무나 구태의연하게 쓰러져 감을 반복했다면, 그건 지금까지의 재미와 보는 이의 의욕을 반감시키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까 삶과 죽음의 무거운 경계를 너무나 무시하는 것이고, 황해를 배경으로 한 조선족의 정체성과 역사, 그 자체를 너무나 어둡게 풀이하는 것과도 같다. 물론 이는 비뚤어진 역사와 인식을 제대로 뒤집어 보고자 한 나홍진 감독의 숨은 의도일 수도 있고 말이다.

영화가 그리는 마지막은 구남의 아내가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내리는 장면이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녀가 돌아오는 씬은 어쩌면 현실일 수도, 혹은 구남의 기억 속에서 바랐던 모습이 화면에 재구성되어 투영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지나버린 현실은 애써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우리가 좇아야 할 것은 지나버린 과거가 아닌, 지금 다시 시작되고 있는 현재와 미래다. 숙제가 주어진 시점은 바로 지금이고, 이제 더는 미뤄서도 늦춰서도 안 될 것은 분명하다.